이웃 배려하며 사셨던 아버지

▲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

 1960년대만 해도 농촌엔 끼니를 걱정하는 집이 많았습니다.

아버지는 가끔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다며 쌀을 봉지에 담아 나가신 후 빈손으로 돌아오시곤 하셨지요. 그러고는 우리도 궁색한 처지에 다른 집 걱정하는 게 가당한 일이냐는 어머니의 역정에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셨습니다. 우리 형편도 녹록지 않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었을 겁니다.
 홍수로 둑이 터져 온 동네가 피난했을 때도 이웃에게 쌀을 나눠주셨습니다. 가진 건 없으셨지만 인정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셨지요.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셨고 어머니와도 크게 다투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. 돈 되는 일이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려움 속에 논밭까지 팔아가며 6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셨습니다. 고3 여름방학,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입고 나갈 옷이 없었습니다.
 아버지는 동대문시장에 가 점퍼와 바지를 사주시며 눈시울을 붉히셨지요. 1988년 신춘문예에 당선돼 인사 갔을 때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다가 한잔 걸치고 들어오셔서 “미안하다. 너는 꼭 대학에 보냈어야 했는데…”라며 울먹이셨습니다. 아버지는 아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미안하셨던 것이겠지요.

▲ 홍태천(1930∼1991)

  아버지는 예순 둘, 젊은 나이에 거짓말처럼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. 엊그제 아흔 둘 되신 큰아버지의 장례를 모시고 왔습니다. 아버지보다 30년을 더 사신 셈입니다.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사흘 내내 울컥울컥했습니다. 가진 건 없으셨지만 넉넉했던 웃음소리와 이웃을 배려하며 사셨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. 

 

 

 

 

 

저작권자 © 미래세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